한국 현대시의 약사

by webmaster posted Jul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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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現代詩 略史


이은봉 


1. 1910년대의 시: 唱歌와 新體詩 

19세기 후반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는 외세 列强의 지배를 견제하면서 서구의 先進 文明과 文化를 받아들여 근대적 自主獨立 國家를 이룩하는 일이었다. 초창기의 신문학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안고 近代文學으로서의 싹을 키워 나가게 된다. 시의 경우에는 이른바 唱歌나 新體詩로부터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시형식으로부터 근대시의 맹아를 찾는 일에 구태여 吝嗇함을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창가는 대강 1890년대 후반부터 불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4년 甲午更張을 기화로 정부가 앞장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독립신문}(1896년), {대한매일신보}(1905∼1910)를 비롯한 여러 신문·잡지 등을 매개로 자주독립, 애국계몽, 개화(근대화)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수많은 창가가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 창가가 씌어지게 된 데는 기독교 찬송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곳곳에 교회당이 세워지고 우리말로 번역된 기독교 찬송가가 불려지기 시작하자 개화사상에 젖어 있던 젊은이들이 당시의 새 풍조에 맞춰 唱歌를 지어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초기 창가는 대개 4 4조의 리듬이 중심이 되었는데, 점차 6 5(3 3 5)조 또는 7 5(3 4 5)조로 바뀌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에는 일본 창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新體詩라는 이름의 新詩가 태어난 시기는 이 창가의 말기와 겹쳐지고 있다. 최초의 신체시로 알려진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 {소년} 창간호)를 쓴 사람이 [소년 대한] [경부철도가] [신대한 소년] 등 많은 애국 계몽적 창가를 쓴 崔南善이라는 사실은 자못 주목을 요한다. 신체시가 전통적인 형식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창가적인 내용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최남선의 뒤를 이어 이광수 등도 창작에 앞장을 서온 신체시는 한결같이 애국독립, 신교육, 근대문명 등 敎訓的이고 啓蒙的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최남선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는 기존의 정형율이 해체되어 있고, 세련된 의성법 등이 응용되어 있어 과거의 시조나 가사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면에서의 정형을 깨뜨렸다는 것 이외에 내용적인 면에서의 시적 緊張이나 興奮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추상적인 정열과 개념적인 의욕을 표출한 데에 지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新體詩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최남선이지만 그것이 그의 독창적 작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정형시 및 하이쿠의 틀을 깨뜨리려는 신시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신체시라고 불렀는데,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최남선이 거기서 그 말을 배웠을 것임은 분명하다. 

돌이켜 보면 영정조 이후 散文精神이 발달하자 평시조로서는 이를 수용할 수 없어 널리 사설시조가 불려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사설시조는 산문정신을 수용하고는 있었지만 운문정신을 완전히 克服하지는 못해 새로운 形式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남선의 신체시가 일본의 新體詩가 아니라 이 사설시조에 맥을 대었더라면 우리 詩史는 얼마간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 1920년대 전기의 시: 근대시의 출발 

우리 시가 맨 처음 서구 시에 접근하려는 노력, 즉 새로운 형식 실험을 보여주었던 것은 동경에서 간행된 유학생 기관지 {學之光}(1914∼1915), 서울에서 간행된 최초의 순문예 주간지 {泰西文藝新報}(1918) 등에 의해서이다. 특히 장두철이 주관한 {태서문예신보}에는 김억이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와 시론을 飜譯했고, 그에 입각해 황석우가 창작시를, 백대진이 평론을 발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중에서도 金億은 시의 세부적인 변화와 율격을 다듬는 일에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이른바 근대시를 形成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가냘프고 섬세한 여성적 애상의 시를 많이 쓴 金億은 최초의 번역 시집인 {懊惱의 舞蹈}(1921)를 간행해 서구시를 우리 나라에 소개한 공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번역 시집을 통해 1920년대 전기의 감상적 낭만주의의 시를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미친 그는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요에 바탕을 둔 시를 씀으로써 전통형식의 移越價値를 재창조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黃錫禹는 초기에 허무주의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썼고 서구시를 모방하기 위해 난삽한 한자어를 많이 썼지만 시집 {자연송}(1929)에 이르러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시집은 단순하면서도 긴장감이 있고,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태서문예신보}는 {學友}(1919. 1), {創造}(1919. 2)가 간행되는 도화선으로도 작용했는데, 그중 {창조}를 대표하는 시인은 朱耀翰으로, 그 창간호에 실린 것이 [불놀이]이다. 우리 나라 자유시의 嚆矢로 평가되고 있는 이 [불놀이]는 자유로운 산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기법도 사용하고 있어 주목이 되고 있다. 또한 시어의 정서적 기능에 대한 자각과, 그에 따른 근대적 의식의 변모를 담고 있는 것도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3 1운동은 현실적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일제가 그 동안의 무단정책을 문화정책으로 바꾸도록 하는 데는 큰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한 {동아일보}(1920) {조선일보}(1920) 등의 발행과 다수의 잡지 발간은 문학의 생산과 발전에 직접적인 기여를 한 바 있는데, 특히 {廢墟}(1920) {薔薇村}(1921) {白潮}(1922) {금성}(1923) 등의 창간은 본격인 시단을 형성케 하고, 시인 및 작가층을 확대케 하는 공적을 남긴다. {폐허}에는 황석우 남궁벽 吳相淳 변영로 등이 참가했으며, 이들은 주로 憂鬱하고 絶望的인 낭만주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백조}에는 李相和 盧子泳 朴鐘和 洪思容 朴英熙 金基鎭 등이 참여했고, 이들은 이상화의 [末世의 희탄], 박종화의 [死의 禮讚],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 어둡고 몽롱한 허무, 과장된 비탄, 애상적 영탄의 감정을 별다른 절제 없이 노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했던 시의 경향을 흔히 '감상적 낭만주의'라고 하거니와, 1910년대 시에 대한 반발로 하여 1920년대 전기의 시는 철저하게 주관적 정감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세기말적 퇴폐 풍조, 세계 제1차 대전 후의 혼미와 허무주의의 유입, 그리고 3 1운동의 패배에 따른 좌절 등이 식민지적 애상과 혼합되어 이러한 공통분모를 형성케 했던 것이다. {폐허} 창간호에 게재된 오상순의 [時代苦와 희생]에 보이는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悲痛한 煩悶의 시대이다"라는 말이 이들의 현존을 단적으로 요약해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공통적 경향 가운데 그래도 비교적 시적으로 성공했다고 할만한 시인은 李相和이다. 그의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은, 그 표현이나 발상은 서구 낭만주의적 性向이 짙지만, 본 바탕은 애국적 정열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특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행과 연, 그리고 작품 전체가 긴밀한 상관관계를 이룸으로써 호흡의 완급이 調節되고 있고, 그에 따라 작품의 내적 질서가 완성되어 가고 있어 자유시의 전범라고까지 할 수 있다. 

{금성}(1923)을 중심으로 활동한 시인은 양주동, 이장희, 백기만, 김동환 등이다. 양주동은 시보다는 고금의 문학에 대한 該博한 지식으로 유명했으며, [봄은 고양이로소이다](1924)로 잘 알려진 이장희는 감정을 절제한 짧은 형식과 뛰어난 언어 감각으로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고,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1925. 3) [승천하는 청춘](1925. 12) 등으로 유명한 김동환은 이른바 북방정서를 바탕으로 强靭한 정신과 氣魄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가장 주목해야 할 시인은 金素月과 韓龍雲으로, 이들은 당시의 문단과는 전혀 무관한 가운데도 매우 卓越한 시적 성취를 거두었던 시인들이다. 동향인 김억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김소월은 시집 {진달래꽃}(1925)을 통해 민요의 가락과 맛을 살려 우리 민족 고유의 情恨의 세계를 노래하는 한편, 유랑하는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 것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본래부터 출가하여 沙門의 일원이었던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1926)을 통해 20년대 시의 보편적 話頭이기도 한 '님'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한편, 불교적 認識의 깊이와 形而上學的 진리를 끈질기게 탐구함으로써 우리 시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1920년대 후기의 시 : 리얼리즘시 운동과 시조 부흥운동 

1920년대 중반에 들면서 또 하나 看過할 수 없는 일은 우리 시가 '시를 위한 시론'에서 탈피하여 시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覺醒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신경향파의 출현이 그것으로, 보통은 김기진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1923년을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이 경향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건설되고, 그에 발맞춰 8월 송영 박세영 심훈 등의 염군사(1922)와 박영희 김형원 이상화 김기진 등의 파스큘라(1923)가 카프(KAPF)로 해체·통합되면서 계급 해방운동이라는 좀더 명확한 目標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 그후 십여 년간, 구체적으로 말해 193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解散될 때까지 이 경향은 문학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만큼 거대한 潮流를 형성해 간다. 

나중에는 조직으로부터 밀려나게 되지만 출발기의 이 경향을 대표한 인물은 [白手의 탄식] 등의 작시를 남긴 팔봉 金基鎭이다. 그는 카프를 조직하고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과 창작 면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김으로써 명실공히 카프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박영희 박종화 등 {백조}파 낭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예술을 생활화하라"는 등의 그의 호소는 초기 신경향파 문학, 즉 생활 문학의 단계에서부터 매우 커다란 役割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계급에 대한 확고한 이해나 구체적인 인식을 자기화한 작품을 남기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불쌍한 사람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적 동정 혹은 연민 등의 차원에 멈춰 있었던 것이 그의 시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러시아의 작가들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듯이 그 자신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는 아니다. 따라서 그가 1927년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의 결과 혹독한 批判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그의 시를 비판하는 데에 앞장섰던 일본 유학 출신의 지식인 시인들, 즉 김창술 이호 김해강 유완희 권환 등의 시가 그의 시보다 좀더 나은 성취를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에도 흔히 '뼈다귀 시'라고 불렸거니와, 이들에 의해 씌어진 '관념적 서술시'의 시적 성취는 실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흔히 그 원인을 과도한 정치성에서 찾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그들의 피상적이고도 추상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뿐만 아니라 槪念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형상으로서의 문학이 이루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 또한 이들의 시를 이른바 '뼈다귀 시'로 남게 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 그러나 林和의 [우리 오빠와 화로](1929) [네거리의 순이](1929) 등 '단편 서사시' 계열의 작품은 비교적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었데, 이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보다는 개인적 재능의 산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식민지 현실의 克服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의 시를 '리얼리즘 시'라는 틀 속에 묶어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식민지 현실의 수용과 시적 성취를 동시에 이룬 것은 오히려 1935년 카프 해체를 전후하여 그 영향 속에서 시단의 전면에 나선 백석 이용악 오장환 안용만 김조규 노천명 등의 작품에 와서이다. 이들의 시가 보여주는 유랑하는 식민지 민중의 형상화는 오늘날에 이르러 살펴보더라도 아주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카프의 결성 이후 그에 대응하여 국민문학 운동이 일어났음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국민문학 운동의 구체적인 모습은 시조부흥운동(1926)의 성격을 띄었는데, 그러한 점에서 보면 이는 일종의 復古主義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정인보 李秉岐 李殷相 조운 등이다. 하지만 시조는 고려말 이래의 오랜 전통을 가진 서정 장르로서, 그에 한국인의 혼이 묻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封建時代의 한 역사적 표현 형식이 아닐 수 없었다. 시조가 현실 적응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대두되는 시대의 주도적인 서정 장르로 거듭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3장 6구의 정형을 기본으로 하는 시조는 현대시의 중심적인 형식으로 재정립되기에는 얼마간 문제가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래 시조는 士大夫 계급의 문학 형식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 시민 계급이 과거의 사대부 계급과 전혀 無關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계급 사이에 이미 삶 일반에 대한 가치 체계가 바뀌었음을 注目해야 할 것이다. 사설시조가 발생한 것에서부터 벌써 시조의 현대적 의의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시조라는 틀로는 당시 일제 강점기하에서는 도저히 민족문학을 수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조 부흥운동이 국민문학 운동과 관련하여 우리 시단에 일시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또한 몇몇 시조시인들의 작품, 특히 이병기와 이은상의 뒤를 이은 曺雲의 작품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 식민지 현실을 반영하는 가운데 우리말을 빼어나게 갈고 닦는 등 얼마간은 시적 성취를 보여준 바도 있다. 

4. 1930년대 전기의 시: 모더니즘과 시문학파의 시 

지금까지 30년대의 시에 대해서는 그 시기의 시가 순수시를 개척하는 데에 앞장 서왔다는 점에서, 곧 20년대의 시와는 질적 변별점을 지닌다는 점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따라서 20년대 시사와 30년대 시사 사이에는 실제와는 다른 단절론이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內面化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30년대 시단에도 여전히 카프 계열의 리얼리즘시가 일정하게 영향을 미쳐온 점에 대해서는 간과되어 왔다. 그러한 면은 김소월과 한용운의 맥을 잇는 시문학파의 작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예의 단절론은 모더니즘의 형성기를 지나칠 정도로 서구 사조의 가시적 유입 시기에 맞춰 설정하는 作爲性을 낳게도 했다. 

우선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술대중화론과 맞물려 김기진에 의해 단편서사시라는 명명을 받은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시가 보여준 영향력이다. 임화 자신이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1933) 등 단편서사시를 계속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갖는 감염력은 상당히 컸다. 당시로서는 예술성을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에도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시형식이 단편서사시였기 때문이다. 김대준의 [누님의 임종](1930), 박세영의 누나(1931), 이찬의 [가고야 말려느냐](1932), 이계원의 [네가 긁은 손톱 자리](1933), 박아지의 [명랑한 삶](1934)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 단편 서사시의 普遍化와 상관없이 카프가 해체되면서 점차 리얼리즘 시에서 그 내용 면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이 탈각되어 갔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리얼리즘시 전반이 그 형식면에서 세련성을 제고시켜 갔다는 뜻이 된다. 30년대 초 이래 순수시 계열의 작품(모더니즘·시문학파)이 강력히 도전해옴에 따라 리얼리즘 시 전반이 좀더 유연하게 당대의 狀況에 대처해 갔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정적 리얼리즘시' 계열의 작품인 조영출의 [국경의 소야곡](1933), 송순일의 [농가의 봄] 등, '비유적 상징시' 계열의 작품인 박세영의 [산제비](1936)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얼리즘시의 경우 자못 적극적으로 순수시 계열의 예술성을 수용해 갔던 것이다. 

모더니즘 시운동은 이미 1926년경에 배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경도지역 유학생 기관지인 {학조}에 1926년 정지용이 이미지즘적 성향의 시 [카페 프랑스] [파충류 동물] 등을 발표한 시기도 그렇거니와, 김광균이 처음으로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 등의 시를 발표한 시기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모더니즘 시운동의 경우 초기에는 문단적 趨勢와 이론적 지지를 얻지 못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이양하 김기림 최재서 등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920년대 후기의 모더니즘 시는 아무런 세계관적 자각 없이 도시어, 문명어 등을 나열함으로써 정신적 깊이와는 무관한 표피적 화려함만을 보여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점차 시적 깊이를 보여주는데, 이들이 추구했던 한결같은 시적 경향은 회화성의 획득에 의한 사물의 객관화였다. 정지용 김기림 金光均 張萬榮 張瑞彦 尹崑崗 등 '온건한 모더니니스트'로서의 이들의 시적 목표는 투명하고 선명한 이미지의 창조였다. 모더니즘 중에서도 이미지즘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을 주로 탐구해온 이들이 그것을 위해 언어의 세공에 기울인 노력은 참으로 컸다. 
특히 김기림은 장시 [태양의 풍속] [기상도] 등을 발표해 모더니즘 가운데에서도 주지주의 성향을 보여주었는데, 基本的으로는 흄·에즈라 파운드·엘리오트·오우든·스펜더 등의 시를 念頭에 두고 있었다. 이 시대 모더니스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 시인은 김광균이었다. 도시와 문명에서 시적 소재를 취한 김광균은 주로 도시와 문명이 펼쳐내는 피폐한 풍광들의 이미지화에 주력했다. 이러한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시적 성공이(김기림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감성의 축출 혹은 개성의 제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感性과 知性의 회화적 조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김기림이나 김광균 장만영 장서언 등의 좋은 시들의 경우 시각적 이미지의 생생한 전개도 전개지만 그 바탕에는 짙은 리리시즘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과격한 모더니스트'로서 이상의 등장도 또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좀더 급진적인 모더니즘의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을 선보인 이상의 시에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입체파 등 여러 경향의 모더니즘이 마구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오감도] [거울] [꽃나무] 등에는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적 긴장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모더니즘 운동과 병행하여 30년대 초 시 본연의 순수성을 주창하고 나선 일련의 유파가 있었으니 정지용 朴龍喆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김현구 허보 등의 '시문학파'가 다름 아닌 그것이다. 박용철이 주도한 {시문학}(1930)과 {문예월간}(1931)에 주로 작품을 발표했던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시의 예술성은 어떤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 본연의 순수성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강렬한 목적의식에 의해 獲得되는 것이 아니라 내밀한 인간 영혼의 순수한 굴착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이들은 主張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순수성은 서구 순수시의 본령인 폴 발레리의 絶對性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동시에 리얼리즘 시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 이들이 주장하는 순수성 추구로서의 시문학파 운동이다. 

당시에는 일본에도 순수시 운동이 있었는데, 이 역시 나프(NAPF)의 리얼리즘시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으로, 독자적인 이론과 미학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문학파}가 내세운 순수시란 思想 및 社會性을 추방한 순수한 서정 일변도의 시이다. 시란 고도로 다듬어진 언어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언어를 세공하고 조탁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준 언어에 대한 예술적 자각이 결과적으로 우리 시의 수준을 한층 높여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순수시가 정통으로 굳어지면서 우리 시에 사상의 빈곤, 자잘한 손재주 등을 그 속성으로 남기게 되었음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문학파의 시인들은 純粹詩를 志向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성격을 보여주면서도 각기 개성적인 자기 세계를 갖고 있었다. 정지용은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도 지적 절제에 따른 세련되고도 참신한 서정의 세계를 차갑게 재구성했고, 김영랑은 향토적 서정을 바탕으로 따뜻하고도 포근한 아름다움을 곰삭은 음악성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신석정은 서구적 牧歌風의 서정을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분위기로 형상화함으로써 우리 시의 정서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에 기여했다. {시문학}을 실질적으로 主導한 것은 박용철이었는데, 그는 [떠나가는 배] [싸늘한 이마] 등의 작품 이외에는 이렇다 할 시적 성취를 남기지 못했다. 이들 시문학파의 정신은 이내 {詩苑}으로 계승이 되었는데, 가장 중심적으로 활동을 한 것은 오일도 김상용 등이었다. 그들은 시문학파 특유의 순수한 서정적 정서에 모더니즘의 투명한 이미지를 결합시켜 매우 명징하고 깨끗한 시를 산출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시문학파의 시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여 일정한 성과를 남긴 것은 한참 뒤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을 통해 데뷔를 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이한직 등 의 시인들에 의해서였다. 

5. 1930년대 후기의 시 : 
서정적 리얼리즘 시와 구경적 생명파 시
 

30년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시사는 빛나는 성취를 거듭해 갔다. 조직으로서의 카프는 해체되었지만 대중화론, 창작방법론 등이 이어졌고, 그에 순수시의 심미성이 조화·통일되는 과정에 나타난 몇몇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은 당시의 시단을 매우 풍성하게 했다. 특히 이미 모더니즘의 洗禮를 받은 일련의 시인들이 시문학파의 서정성, 그리고 단편서사시류의 현실성 등을 자기화하면서 보여준 리얼리즘 시로서의 成就는 놀랄 만 한 것이었다. 白石 李庸岳 吳章煥 金朝奎 안용만 노천명 등이 그들로, 일단 모더니즘의 자양분 속에서 시적 출발을 한 그들은 낭만적 상실의식을 끌어안는 가운데 리얼리즘으로서의 세계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들의 시는 근대적 지성, 서정적 낭만성, 깨어 있는 現實認識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가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는다. 이른바 재북시인이거나 월북시인인 이들의 시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해금되고 硏究되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의 결과로 형성된 과도한 냉전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았던 시인은 백석 이용악 오장환 등이었다. [여승] [팔원] [城外] [모닥불] [정문촌] 등 평안도 방언 일색의 백석의 시는 流浪하는 식민지 백성의 처참한 삶의 실상을 객관적 지성으로 통어하는 가운데 매우 슬프고도 아름답게 형상화했고, [북쪽] [그리움] [전라도 가시내] [낡은집] [강가] 등 침통한 서정의 이용악의 시는 북방의 國境周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외된 삶의 형상을 다양한 시적 장치로 진실하고도 정성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暮村] [北方의 길] [붉은 산] [고향 앞에서] [溫泉地] 등 위악한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는 오장환의 시는 이미 자본주의적 부패와 타락의 징후가 충만한 식민지 현실을 탕아로서의 배역을 통해 뜨겁고도 간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시는 끊임없이 당대의 현실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예술적 심미성을 탐구하는 가운데 씌어졌다는 점에서 아직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의 시에 와서 우리의 시는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洞察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준 높은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인이 그 당시 서로 특별한 親分을 맺었거나 인간적 交流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체로 임화에 의해 비평적 옹호를 받기는 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시대정신이 만든 중요한 시사적 흐름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 [詩人部落] 동인으로 참가한 바도 있는 오장환의 시는 때로 고양된 생명의 응어리와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어 좀더 주목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시적 경향을 드러내는 어떠한 시론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시인부락}의 창간호이다. 12명이나 되는 {시인부락} 참가자들 모두가 동일한 시적 特徵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장환의 시의 이러한 면은 주로 徐廷柱, 유치환, 金東里 등의 시와 공통점을 갖는데, 그에 기초해 서정주가 자신의 시를 포함해 이들의 시가 이루는 일련의 특징에 대해 생명파라는 이름을 붙여던 것이다. 물론 {시인부락}의 서정주 오장환 김동리, 그리고 {생리}의 유치환 등의 시에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疾走하고 猪突하고 향수하고 原始回歸하는 본능적 아우성, 퇴폐적 방황, 구경적 삶에 대한 탐구 등의 정신이 자리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더니즘과 시문학파의 詩的技巧를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저항해 모더니즘이 보여주었던 機械文明 중심의 무생명성, 시문학파가 보여주었던 자연 일변도의 무인간성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이들의 시이다. 또한 당시 새로운 기운으로 사상계를 풍미했던 휴머니즘 운동도 그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파악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우리 시단에 이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생명파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의식적인 뚜렷한 시적 경향과 운동이 구체적으로 存在했었던 것은 아니다. 생명파는 당시의 시사를 정리하면서 김동리, 서정주에 의해 주장되고 정한모 김용직 오세영 등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그 면모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문둥이] [대낮] 등 서정주의 시에는 들끓어 오르는 젊은 영혼의 本能적 몸부림과 통곡이 밀도 있게 그려져 있고, [海獸] [鄕愁] 등 오장환의 시에는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방황하는 자아의 울분과 정열이 거짓없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깃발] [바위] 등 유치환의 시에서는 고압적 어투로 강인한 남성적 자아가 외치는 거친 肉聲을 찾아볼 수 있다. 

6. 1940년대의 시 : 암흑기의 자연시와 저항시, 
그리고 해방기의 실천시와 행동시
 

1939년에 이르면 {文章}을 통해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온 몇몇 중요한 시인을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朴斗鎭 趙芝薰 朴木月 박남수 이한직 김종한 등이 그들로, 그들은 데뷔한 직후 곧바로 1940년대 초의 암흑에 갇혀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 그러다가 해방 직후인 1946년 이들 중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합동시집 {靑鹿集}을 냄으로써 흔히 청록파 또는 3가시인으로 불리며 脚光을 받게 된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이들의 시는 실로 한 모금의 청량음료처럼 新鮮한 것이다. 

시문학파의 滋養分, 특히 우리말을 갈고 닦는 데에 앞장섰던 정지용의 영향을 받은 이들 세 시인의 주요 관심사는 기본적으로 自然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는 자연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금씩 달랐다. 박목월의 시가 토속적이라면 조지훈의 시는 선비적 체취가 짙었고, 박두진의 시는 관념적 경향이 강했다. 박목월은 향토색 짙은 소재를 명사형 어미 중심의 시문장으로 포착해 그것이 담아내는 이미지를 섬세하게 연결하는 정물화 같은 시를 주로 남겼고, 조지훈은 문화적 보수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가운데 옛 풍물 및 전통적 秩序에의 그리움을 담아내는가 하면, 한시적 교양이 짙은 우국적이고도 지사적인 풍모의 시를 주로 남겼다. 그에 비해 박두진은 기독교적 메시아 사상을 근간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조금은 관념적인 희망을 빠른 가락으로 노래하는 가운데 미래에의 樂觀적 展望과 理想을 드러내는 시를 주로 발표했다. 

만주강점(1931)으로 시작된 일제의 대륙 침략이 1939년에 이르면서 세계 제2차 대전으로 확대되자 그들은 국내의 진보적인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은 사회주의자들과, 그에 입각한 문화 예술인들이다. KAPF의 해체도 이러한 과정에 이루어졌거니와, 국내의 지식인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참으로 혹독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하에서 시인의 길은 대강 넷으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해외로 떠나버리는 길(조명희 유치환 김조규)이요, 둘째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는 길(박세영 김현승 오장환)이요, 세째는 저들의 검열을 피해 계속해서 붓으로 싸우는 길(이육사 윤동주 김광섭)이요, 네째는 일제에 아부하여 친일문학으로 전락하는 길(모윤숙 서정주 임학수)이었다.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기는 했지만 좀더 용감하고 양심적인 일은 꾸준히 일제에 도전하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일이어서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李陸史 尹東柱 金珖燮이 그들로, 마침내 그들은 혹독한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실은 그들로 하여 우리 민족문학은 命脈을 이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만주로 활동공간을 옮긴 유치환 김조규 등의 시인은 {만주시인집}(1942), {재만조선시인집}(1942) 등을 간행하며 막힌 숨통을 틔우기도 했다. 

윤곤강, 신석초 등과 함께 {子午線} 동인으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이육사는 시를 통해 충만한 선비적 기개를 보여준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가 하면, 가장 많은 감옥살이(17번)를 한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민족의 해방, 광복에의 念願과 意志를 탄탄한 언어로 조형해낸 [청포도] [광야] [절정] 등 그의 시는 시적 기교도 탁월하여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윤동주는 일제말 암흑기의 가장 상징적인 시인이다. 그는 심각하고 순결한 내적 체험을 바탕으로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대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절박한 아픔과 정직한 고뇌를 감동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바 있다. [서시] [십자가] [자화상] [별을 헤는 밤] 등 일제하 우리 민족의 깨끗하고 無垢한 靈魂이 일구는 정신의 높은 경지는 처절한 양심선언을 방불케 한다. {시원}의 동인이기도 했던 김광섭의 시는 시대적 고뇌, 개인적 우수, 사색과 관조를 주조로 하는 등 주지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는 깨어 있는 젊은이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마저, 그러한 정도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일제말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彈壓과 搾取에 시달리는 동포들의 참상은 보지 못한 채 개인적 영달과 영화에 눈멀어 함부로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기리고 讚揚하는 시인들도 적잖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고 辨明할지는 모르지만 이들 식민지 지식인이 보여준 왜곡된 허영심은 뜻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는 데 충분했다. 차마 이름을 거론하기에 미안할 만큼 수많은 시인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부화뇌동했으니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해방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놈처럼 새벽에 살짝 왔다. 우리의 힘에 의해 쟁취한 독립이 아니라 연합군의 힘에 의해 주어진 독립이었기에 미처 자율적 대응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민족은 깊은 混亂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적 경향에 따라 수많은 정파가 생겨나고, 그에 立脚해 우리 문단도 여러 갈래로 분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저기 우후죽순처럼 문예지들이 솟아났고, 그동안 숨을 죽였던 시인들은 다시 목청을 가다듬어 마음껏 우리 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젊고 패기 있는 새로운 시인들도 적잖이 등장한다. 

해방기 가장 큰 특징은 순수문학과 프로문학의 대립이다. 좌파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학가동맹', 우파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필가협의회' 및 '청년문학가협의회'가 그 중심이었는데, 1930년대까지는 순수시를 표방했던 정지용 김기림 이용악 오장환 김광균 등이 '조선문학가동맹' 측에 加擔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문학가동맹' 측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임화 설정식 권환 박세영 이찬 조벽암 임학수 여상현 박아지 최석두 상민 등이 있었고, 신인으로는 {前衛詩人集}(1946)의 필자이기도 했던 유진오 김상훈 김광현 이병철 박산운 등의 활동이 눈부셨다. 작품의 양에서는 우파 측에서는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만큼 왕성하게 활동을 했는데, 특히 시집 {창}을 남긴 유진오는 미군정하 최초의 필화시인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끈다. 

'청년문학가협의회'의 代表的인 시인은 서정주 김달진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박남수 이한직 등으로, 이들 중에서도 특히 1946년에 간행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집}은 명확하게 우리 시단의 方向을 암시해주는 것이었다. 뒤이어 모윤숙의 {옥비녀}(1947), 유치환의 {생명의 서}(1947), 서정주의 {귀촉도}(1948), 김용호의 {해마다 피는 꽃}(1948) 조병화의 {버리고 싶은 유산}(1949) 등의 시집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러는 중에 이들의 시는 점차 우리 시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이들 순수시가 그 당시 프로시를 辨證法的으로 극복해낸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일방적인 庇護 아래 성장한 것은 우리 시의 객관적인 미래를 위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시로 하여금 오랫동안 현실 기피의식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그 즈음 서정주의 변모는 우리 시사에서 충분히 記憶될 만한 것이었다. 통곡과 몸부림의 시를 매개로 진실을 찾아 헤매던 그는 해방 후 [밀어] [추천사] [국화 옆에서] 등의 작품에 이르면서 점차 삶의 현장으로부터 한 걸음 비켜 선 채 이승과 저승의 신비한 교감 혹은 복고적 무당취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회 현실과의 긴장을 견디지 못한 그가 우리의 옛것 속으로 도피하고 만 것인데, 그의 시집 {귀촉도}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가 이러한 취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 [上里果園] [無等을 보며] 등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7. 1950년대의 시 : 전쟁체험의 형상화, 
순수 서정의 회복, 그리고 근대성의 새로운 탐구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조지훈, 서정주, 이한직, 박목월, 구상, 김윤성 등 많은 시인들은 '문총구구대'의 일원으로 전선에 나간다. 특히 조지훈, 모윤숙, 김윤성 등은 중앙방송국의 마이크를 잡고 승리를 외치는 격시를 낭송하기도 한다.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는 당연히 전쟁의 비극과 조국애를 노래한 시들이 실리게 된다. 전쟁을 노래한 최초의 시집은 유치환의 {보병과 더불어}(1951. 6)였는데, 이어 趙靈岩의 {屍山을 넘고 血海를 건너}(1951)가 나왔고, 모윤숙의 {풍랑}(1951)이 나왔다. 조지훈의 {역사 앞에서}(1959)와 구상의 {焦土}(1956)는 훨씬 뒤에 나온 시집이기는 하지만 그 무렵에 쓴 많은 전쟁시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은 반공의식을 고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쟁에 따른 아픔과 상처를 깊이 있는 인간애로 감싸안거나 洞察하고 있지는 못한다. 맹목적 증오감, 승리에 대한 과도한 도취 등으로 전쟁시의 우수성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만 구상의 [초토의 시] 연작은 전쟁시로서 그런 대로 일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는데, 이데올로기의 우열보다는 인간성 자체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6 25전쟁 이후 분단이 確定되고 남한의 政治權力이 구체적으로 그 성격을 드러내면서 결국 우리의 시는 또 다시 순수시를 중심으로 정통성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적잖은 뛰어난 시인들이 越北의 길을 택해 어쩔 수 없이 우리 시단은 해방 이전의 암흑기로 후퇴하고 만다. 물론 이들 월북 시인들에 의해 북한에서 이루어진 문학활동이 상상 밖으로 초라한 것이었음을 알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의 전쟁을 거친 후 우리 시단은 대략 두 가지 경향의 시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 하나는 서정주 박목월로 대표되는 전통적 복고적 서정의 추구요, 다른 하나는 30년대 김기림 이상 등에 의해 시작되어 〈후반기〉동인들로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추구이다. 이들 경향은 심지어 한 시인의 시속에서도 서로 교차되고 配合되면서 60년대 4 19 직후까지 우리 시의 주류로 자리하게 된다. 

앞의 경향, 즉 전통적 서정의 경향이 자리를 잡는 데는 1949년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등이 중심이 되어 발간했던 {문예}의 힘이 컸다. 서정주가 {문예}의 추천위원이 되면서 자기와 비슷한 많은 신인들을 배출했던 것이다. 그들 중 중요한 시인으로는 李東柱, 李元燮, 全鳳健, 崔寅熙, 李轍均, 李炯基, 李壽福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정한모 박용래 박재삼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이창대 이성교 구자운 천상병 정렬 김남조 등도 1950년대에 문단에 나와 점차 일가를 이루어간 시인들이다. 이들 중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익숙한 어휘와 가락을 통해 이미 오래도록 낯익은 우리의 情緖를 노래했다. 그 정서의 결이 맑고 고울 뿐더러 깊은 서러움과 한을 담고 있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한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게도 했다. 아름다웠던 과거에 매여 그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의 정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뒤의 경향, 즉 모더니즘적 경향은 6 25 전쟁의 結果 피난지 부산에서 결성된 〈후반기〉동인들에 의해 이끌어졌는데, 그 주요 인물은 조향 김경린 김규동 박인환 이봉래 김춘수 김수영 등이다. 그들 중의 일부는 이미 1949년 모더니즘 성향의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낸 바 있었다. 외래어, 관념어 등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동원했던 이들 〈후반기〉동인들의 시는 한편으로 平凡한 독자로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를 이미지들을 마구 나열하는 데에 급급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특히 한국의 현실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채 절대적 무의미의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데 바빴던 조향과 김경린의 시는 그 내용 면에 있어서는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에조차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어쨌든 분주하게 국적 없는 피상적인 근대성을 쫓아 다녔던 이들의 시는 60년대까지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이들 중 그나마 일정한 정도의 시적 성취를 남긴 시인은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인 세계인식을 형상화한 김춘수이다. 그 나름으로 정작의 모더니티를 찾아 방황했던 김수영의 시도 기억될 만하다. 

50년대의 後半에 이르면서 우리 시단에는 얼마간 성격이 다른 또 한 떼의 모더니스트들이 등장했다. 金顯承 宋稶 全榮慶 金丘庸 辛東門 등이 그들로, 그들은 종래의 시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배반하는 형태를 취한다. 특히 산문에 방불했던 송욱 전영경 김구용의 시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의 싹이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과격한 태도가 〈후반기〉동인들의 모더니즘과 이들의 모더니즘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7.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시 : 
모더니즘의 변용과 리얼리즘의 회복 

60년대를 특징짓는 역사적 사건은 4 19혁명과 5 16군사쿠데타이다. 분단 이후의 역사로 볼 때 전자는 이상의 實現이었고, 후자는 이상의 挫折이었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의 시는 자연스럽게 현실에 대해 눈을 떠갔는데, 특히 4 19혁명이 당시의 시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것은 정진규 김규태 이승훈 이유경 이건청 이수익 김종해 오세영 허만하 오탁번 박의상 김영태 등 [현대시] 동인의 경우이든, 그렇지 않은 정현종 오규원 마종기 홍신선 최하림 마종하 이탄 신중신 홍희표 등의 경우이든, 이들 모더니즘을 標榜한 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4 19혁명의 좌절에 따른 불모성이 이들 모더니스트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傷處를 심화시킨 것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내면세계에 도사려 있는 '망가짐 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정작 예술적 성취를 얻게 된 것은 70년대에 와서인데, 이들의 시 역시 그러면서 점차 우리 시의 한 맥을 형성해 갔던 것이다. 

1960년대의 동인 그룹으로는 앞에서 말한 {현대시}와 더불어 {신춘시}를 주목해야 한다. 강인섭 권일송 박봉우 장윤우 신세훈 윤삼하 홍윤기 이수익 이근배 이탄 권오운 전영경 조태일 이가림 김광협 강인한 등 모두 신춘문예 당선자들이었던 이들의 시는 공히 선이 굵고 골격이 크며 현실의식이 농후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60년대의 시와 관련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김후란 유안진 천양희 김여정 노향림 강은교 허영자 문정희 등 적잖은 여류 시인들이 등장하여 우리 시단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강은교 천양희 노향림 문정희 등의 시는 자기 시대의 진실을 잃지 않기 위한 강렬한 몸부림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드러내고 있어 좀더 주목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당대의 시단 상황을 살펴보면 좀더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주장했던 辛東門 金洙暎 申東曄 박봉우 등의 시가 그 主流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 옳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었던 현실인식, 역사의식으로서의 시정신도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화하게 된다. 이들 중심의 리얼리즘시는 훨씬 적극적으로 당대의 현실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또한 실천적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 시대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그러는 중에도 결코 예술적 완미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모더니즘시보다 우위를 점했다. 현실인식, 역사의식에 바탕한 리얼리즘시 역시 4 19혁명에서 발원을 했는데, 따져보면 6 25전쟁 이래 끊겼던 우리 시사의 한 흐름이 그제서야 비로소 복원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리얼리즘시가 해방기 프로시의 맥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당대의 현실 그 자체에 실사구시의 자세로 임했던 것이 이들의 시였다. 

신동문은 모더니즘의 기법으로 현실의 모순을 담아냈던 시인으로, 장시 [풍선기]를 남겼다. 역사의 진보, 민중의 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담고 있는 [아! 신화 같은 다비데군들]과 같은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그의 시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현실인식이요 비판정신이었다. 김수영은 50년대의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시인이었으면서도 4 19 이후 가장 먼저 민족의 현실에 뛰어 들었다. [하 그림자 없다]에서 볼 수 있듯이 4·19 이후 그의 시는 항상 당대 사회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들었다.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쇄신의 진취적 정신이 모더니스트로서의 그의 한계를 돌파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탁월한 시적 성취를 이룬 [푸른 하늘을] [눈] [풀] 등의 시에 드러나 있는 혁명정신과 민중의식을 보면 말년에 이르러 어느 정도 모더니즘의 弊害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시 [풀]에서 비롯된 '풀'의 이미지는 이 시기의 우리 시 전반의 핵심 이미지로 확대되어 갔다. 신동엽은 60년대의 우리 시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시인이다. 분단 조국의 비극적 상황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던 그는 항상 민중의 시각으로 민족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민족 통일을 가장 높은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그의 시는 기본적으로 원시반본적 아니키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주목을 요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시를 더욱 힘차게 하는 것은 언젠가는 분단 조국의 悲劇的 狀況이 반드시 극복되리라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신동문, 김수영, 신동엽의 현실인식 역사의식의 시는 60년대 말을 거쳐 70년대에 이르면서 점차 민중의식의 시로 심화, 전화되는데, 高銀 申庚林 황명걸 민영 이성부 趙泰一 김지하 문병란 양성우 정희성 조재훈 강은교 이시영 송기원 金準泰 任洪宰 金明秀 이동순 김창완 정호승 김남주 고정희 하종오 등이 그 대표적인 시인들로, 이들은 주로 1966년에 간행된 계간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70년대의 리얼리즘시는 현실을 보는 날카로운 눈과 굳건한 意志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따뜻함을 지니고 있어 높게 평가되고 있다. 현실에 기반하여 끊임없이 오늘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면서도 끝내 서정시 본래의 심미적 정감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다. 특히 신경림의 민중 정서에 기초하고 있는 작품들, 김지하의 민족 형식에 기초하고 있는 작품들은 매우 탁월한 미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신경림의 시집 {농무}(1973)는 해방 후 우리 시의 최대 성과로 손꼽히고 있으며, 김지하의 시집 {황토}(1970)도 격렬한 어조로 당대의 현실을 증언하고 있어 주목이 된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고 각종 긴급조치로 전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자 문인들은 그에 분연히 항거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특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김지하의 구속과 그 석방운동의 과정에 탄생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다. [오적]·[앵적가]등의 장시로 유신의 심장부를 강타한 김지하 시인이 거듭해서 피체, 투옥되자 1974년 11월 급기야 이호철 고은 신경림 백낙청 염무웅 박태순 조태일 이문구 이시영 송기원 등 양심적 문인들이 예의 급진적 문학단체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70년대의 이른바 참여시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중심으로 활성화되었음은 새삼스럽게 되물을 필요가 없다. 

5∼60년대를 거쳐 온 모더니즘시는 70년대에 이르러 더욱 세련된 형태의 시적 업적을 남겼다. 황동규 오규원 정현종 신대철 장영수 이하석 이태수 김형영 문충성 김명인 김광규 등의 시가 그것으로, 이들의 시는 고도로 훈련되고 다듬어진 아이러니적 知性에 의해 組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서적 감동보다는 지성적 기쁨에 의지해 있는 이들의 좋은 시에는 지난 시대의 모더니스트가 보여주었던 말초적 기교주의나 불필요한 난삽성이 상당 부분 가셔져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들은 주로 1970년에 간행된 계간 {문학과지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시가 추구해온 현대성이 어느 정도는 이 땅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 이르러서도 우리 시단에는 전통적 서정시의 굵은 줄기가 면면히 이어져 왔다. 청록파와 서정주의 뒤를 잇는 이들 흐름을 대표하는 시인은 송수권 나태주 이성선 조정권 허형만 등인데, 이들 시인은 청록파의 시나 서정주의 시가 미치지 못한 독자적인 領域을 開拓하는 가운데 우리 시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그밖에도 70년대에 들어 맑고 깨끗한 시를 많이 써서 서정시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박용래와 천상병의 시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8. 1980년대의 시 : 민족·민중 현실의 탐구 

80년대는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개막된다. 10 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광주민주화운동을 빌미 삼아 총칼로 권력을 틀어쥔 신군부는 일제를 방불할 정도로 전국민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나간다. 그것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중 문학의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씨알의 소리} {뿌리깊은 나무} 등 이 나라 지성인들의 건전한 토론 매체를 폭력적 방법으로 폐간한 일이다. 특히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 문예계간지의 강제 폐간은 우리 문학계에 한동안 적막감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땅의 깨어 있는 시인들이라면 더 이상 저들에 의해 재갈을 물린 채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1983년에 이르자 신군부의 억압 통치에 對抗해 곳곳에서 게릴라적 신속성을 갖는 동인지와 무크지(부정기간행물)가 발간되는데, 그것의 선편을 친 것은 진보적 문학진영을 총망라하는 종합매체인 {실천문학}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에 뿌리를 둔 광주 전남 중심의 시전문 동인지 {오월시}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서울 경기지역의 시전문 동인지 {시와 경제}, 대전 충남지역의 종합문예지 {삶의 문학}, 청주 대구지역의 종합문예지 {분단시대}, 마산 경남지역의 종합문화지 {마산문화}, 부산 경남지역의 종합문예지 {지평} 등이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져 나와 신군부의 문화논리에 대항해 간다. 따라서 민족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1980년대의 우리의 시는 기본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에 문화적으로 抵抗하는 운동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오월시}의 주요 시인은 곽재구 최두석 김진경 이영진 윤재철 나해철 박몽구 나종영 강형철 등이었고, {시와 경제}의 주요 시인은 채광석 황지우 김정환 김용택 김사인 정규화 홍일선 등이었다. 그리고 {삶의 문학}의 주요 시인은 이은봉 김흥수 윤중호 정영상 이재무 조재도 등이었으며, {분단시대}의 주요 시인은 도종환 김용락 배창환 김창규 김종인 김윤현 등이었다. 그밖에 경희대 중심의 동인지 {시운동}(류시화 박주택 남진우 이문재 등), 서울대 중심의 무크지 {문학의 시대}(홍일선 김태현 등), 문학과지성사에 간행한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정과리 이인성) 등도 이 시대 문학운동을 선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침내 이들은 장시간의 토론을 거쳐 1984년 11월 유명무실해진지 이미 오래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창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전두환 군사정권의 문화정책에 강렬히 대항해 나간다. 이들 중심의 문학운동은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저항해 불꽃처럼 일어난 이른바 6월 항쟁의 중요한 도화선으로 작용해 특히 주목이 되었다. 그 이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해체, 재건설되면서 1980년대 후기의 민족 현실을 맞게 된다. 한편 이들 젊은 시인들은 1980년 말 각각의 정파에 따라 민중적 민족문학, 자주적 민족문학, 노동해방문학 등으로 분열되면서 공리공론으로 흐르게 되어 뜻 있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80년대 중반 이들 젊은 시인들의 시가 우리 시단에 몰고 온 바람은 매우 컸는데, 기존의 맥빠진 서정시를 써온 시인들은 거의 설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삶의 문학} 동인들은 공동창작 농민시 {옹매듭두 풀구유} 연작을 남겨 80년대 우리 시단에 한동안 그 붐이 일어나게도 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실천문학}, {사상문예운동}, {녹두꽃}, {노동해방문학} 등이 공동창작의 작품을 게재했는데, 이는 집단창작, 조직창작 등으로 그 이름과 개념을 발전시켜 가며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아예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문학위원회에는 따로 오철수 이규배 등이 중심이 되어 '민해문창작단'을 꾸려갈 정도였다. 

80년대의 시사에서 또 하나 看過할 수 없는 일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운동의 현장에서 곧바로 뛰어난 시인들이 불거져 나왔다는 사실이다.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불거져 나온 시인으로는 박영근, 박노해, 백무산, 김기홍, 김해화 등이 있고, 농민운동의 현장에서 불거져 나온 시인으로는 홍일선 고재종 박운식 이중기 등이 있으며, 탄광운동의 현장에서 불거져 나온 시인으로는 성희직 등이 있다. 특히 박영근의 {취업공고판 앞에서}는 노동시의 단초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는 그 정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이 되었다. 그밖에 80년대의 민족시와 관련하여 제주도 4·3사건을 구체화한 [한라산]의 이산하, 지리산 빨치산 투쟁을 그린 [지리산]의 김형수, 화순 탄광 노동자 운동을 노래한 [검은산 붉은 피]의 오봉옥, 광주항쟁의 아픔을 형상화한 {매장시편}의 임동확 등도 기억을 할만한 시인들이다. 

전통에 기반을 둔 서정시도 여전히 씌어졌지만 아무래도 당대의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絶緣된 채로는 讀者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없었다. 심미적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전제 아래 시가 당대의 삶의 현실에 대한 發言의 한 형식이라는 사실이 普遍化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시인은 이광웅 김희수 김용범 고형렬 김수복 김백겸 오태환 안도현 박선욱 정일근 양애경 공광규 최영철 서지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에 토대를 둔 시인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1980년대의 현실 문제를 명확히 객관적인 시적 대상으로 포착해냈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자기 시대가 함유하는 근대성의 참다운 의미를 처절하게 되묻고 있는 시인들도 없지 않았다. 김승희 최승자 김혜순 김정란 같은 여류 시인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시인들이다. 이른바 해체시의 선두주자인 황지우 박남철 김영승은 물론이거니와 이성복 최승호 장석주 이윤택 홍영철 정인섭 이영유 박태일 하재봉 기형도 장정일 등도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 現代性이 갖는 제반 문제를 시의 내포로 받아들여 우리 시를 살찌게 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시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한 서정윤과 이해인도 기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서구의 자유시를 받아들여 전래의 서정 형식으로 내화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100여 년에 이르고 있다. 新文學 초창기 이래 온갖 迂餘曲折을 겪어오는 동안 우리 시도 이제 그 기틀과 역량이 충분히 成熟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천년, 그리고 새로운 백년이 시작되었으니 만큼 앞으로는 좀더 현격한 도약과 발전을 기다려도 충분히 좋으리라.

<출처:이은봉님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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